포도
포도를 마음대로 사 먹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캐나다에서 공부할 때였다.
비싼 대학원 학비에 빠듯한 생활비까지,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다.
과일 중에서 포도를 제일 좋아했지만,
그 당시 유난히 비쌌던 포도는
사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제는 제철 포도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
아니, 제철이 아니더라도
사계절 언제든 포도를 먹을 수 있다.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어찌 포도뿐일까.
문득 절친인 정신과 교수 친구가
소주 한잔 기울이며 했던 말이 떠오른다.
“이 소주 한잔도 내 환자들의 고통 덕분에 마실 수 있는 거야.
환자분들의 고통이 내게는 생계가 되고 있지.
그러니 이 소주 한잔이 참 감사하네.”
내게도 그러하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들 역시
누군가의 고통과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이다.
오늘 내가 먹는 포도 한 알도
내가 만나는 내담자분들의 고통과,
교육에 참석하시는 분들의 열정으로
사 먹는다.
이렇게 먹고, 마시고, 입으며
살아가는 모든 날이
누군가의 고통과 노고 덕분이니,
이 하루를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을까.
귀하고 귀한 시간으로 살아내야 한다.
포도 한 알이
내 입에 오기까지의
그 모든 수고만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