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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레치

관리자2026년 5월 29일조회 100
스크레치


오늘 아침 엄마를 모시고 안과에 갔다.


병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데,

그만 벽에 차를 긁고 말았다.

주차 자리가 없어 지상 3층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위층으로 올라가는 코너가 워낙 좁았다.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나도 모르게 벽을 스치고 지나간 모양이다.


차에서 내려 보니 범퍼 앞쪽에 작은 스크레치가 나 있었다.

순간 속상한 마음이 확 올라왔다.


운전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올걸.

오늘 다른 약속이 있었는데 그냥 그곳으로 바로 갈걸.

안과는 내일 올걸.

차를 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늘 이런 일이 생길까 봐 얼마나 조심했던가.


이미 벌어진 일이지만 ,

한국의 좁은 주차 현실에 대한 원망과 함께 온갖 후회가 밀려왔다.



언젠가 미국에 사는 형부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내게 웃으며 놀리듯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처제가 한국에서 운전하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해. 이건 신비야~."


맞다.

운전한 지 30년 가까이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초보 운전자 같다.

보기보다 겁이 많은 나는 늘 사고만 안 나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도 초보의 마음으로 운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누가 봐도 불안불안한 운전인데,

그 복잡한 서울 도심은 물론 전국 방방곡곡을 KTX나 고속버스보다

자가 운전으로 다니고 있으니 내 자신이 스스로 신기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속상했던 걸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꽃병이 깨져서 마음이 상하는 것이 아니라,

꽃병은 깨지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을까.


차에 스크레치가 나서 속상한 것이 아니라,

차에 스크레치가 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속상했던 것은 아닐까.


'...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생각을 넘어선 하나의 신념.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스크레치가 아니라,

이러한 신념에 뿌리를 둔 스크레치에 대한 나의 생각과 센세이션(sensation)이였던 것 같다


차에 스크레치가 난 것을 보신 엄마께서 말씀하셨다.

"크게 사고 안 나서 다행이다."

"다른 차를 긁은 게 아니라 다행이다."

"살짝인데 뭐. 티도 안나는데..

이 정도인게 다행이지."

솔직히 말하면 그 말씀들이 그 순간에는 크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차에는 스크레치가 났지만,

내 마음에는 스크레치가 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것.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평소 어떤 신념들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까.


'차에 스크레치가 나서는 안 된다'는 신념처럼,


'누구도 내 마음에 스크레치를 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나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

'관계는 늘 아름다워야 한다.'

'나는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 등등...

이밖에도 많은 신념 속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을 하니 그동안 관계 속에서 속상하고 아쉬웠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우리는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며

그러한 관계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고받은 상처가

우리 존재 자체에 스크레치를 낼 수는 없다.


차의 본래 목적은 사람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이다.

그 정도의 스크레치가 차의 본래 목적을 훼손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살아오며 내가 받았던 마음의 스크레치가

나의 본래 존재 가치와 삶의 목적을 훼손할 수는 없다.



안과 진료를 마친 후,

평소 가장 신뢰하는 자동차 정비소를 찾았다.

사장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정도는 간단히 페인트 칠하면 됩니다."


차 색에 맞는 페인트를 주문하고 도장 날짜를 예약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문득 생각했다.


그래.

차의 스크레치에 페인트를 칠하듯,

내 마음의 스크레치에도

그에 맞는 페인트를 칠하자.


이해의 페인트.

수용의 페인트.

감사의 페인트.



그리고 무엇보다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내려놓고,

'...할 수도 있다'는 여유의 페인트.


그 페인트를 마음에 살짝 덧칠해 본다.


조금 위로가 된다.

그리고 조금은 자유로워 진거 같다.


(Written by Mira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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